역사교과서 파동과 한국의 역사교육 -우리의 역사인식은 어느 정도인가.


 역사기행 예전 기고문 (2004년경)




 

역사교과서 파동과 한국의 역사교육

-우리의 역사인식은 어느 정도인가.

 

1. 역사와 역사교육의 의미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경험으로서의 역사와 그에 대한 지식은 별로 실효성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사회 변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그 속에서 개인에게 요구되는 사항이 획일화될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 커질 거라는 우려가 커집니다. 21세기가 시작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인류는 과거의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문제들의 원인을 파악하려면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적 배경 속에 나타난 모습을 살펴보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배경을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실제 진행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라면 다른 하나는 이미 진행된 과거완료형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관념적인 것이지 실제로 가능한 구분은 아닙니다. 미래는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과거입니다. 미래라는 것은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가 경험한 현재입니다. 과거라는 것은 오직 기억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표현하면 미래는 조만간 가게 될 곳이며 과거는 우리가 떠나가는 곳입니다. 역사란 ‘과거’가 아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나아가는 길’입니다.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고 미래는 그러한 현재의 결과입니다. 즉, 과거는 과거이고 미래는 미래일 뿐일 수 없는 것입니다. 미래를 만들어 가는 힘과 방향성은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고 가치판단을 하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들의 원인과 배경이 과거에서 연유된 것이라면 역사교육이란 현재의 인류대중이 현실 문제를 인식하고 그 근원을 찾아가는 힘을 개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P. 프레이리는 교육이란 “현실을 설명할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을 찾게 해주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역사에 대한 교육이란 역사적 지식에 대한 교육일 뿐만 아니라 실제 역사가 진행되어 나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도출케 하는 교육인 것입니다. 혹자는 이를 교육의 이념화라고 비판할 지도 모르겠지만 만일 현실을 수용할 것만을 가르치거나 과거의 역사적 지식만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교육이라면 그것 역시 특정한 정치 목적을 가진 ‘체제 유지 이데올로기’일 뿐입니다.

 

2. 왜곡된 역사교육의 문제는 무엇인가.

 

사관(史觀)이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여 해석하는 근본적인 가치관을 말합니다. 즉,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기본문제에서 시작되어 개별 사건에 중요도나 의의를 부여하게 되지요. 이러한 사관은 역사적 자료(史料)를 해석하는데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저마다 개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상황을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은 사회활동을 거듭하며 상호작용을 거쳐 강화되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합니다.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생기는 것은 적절한 시기에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감정은 흔히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관 역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칩니다.

 

대개 정치적 이념의 영향을 받은 사관은 동일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리는 장본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역사가에 의해 작성된 역사서술이나 분석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거나 배척하기 전에 그 이념적 배경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에 의해 왜곡된 사실(史實)에 자신의 주체적인 가치관이 침범당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념사관이란 모두 잘못된 것일까요. 이념이 역사연구나 서술에 너무 강한 영향을 행사한다면 곤란하겠지만 결국 역사가도 사회에 속한 개인이므로 나름대로 이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정도는 인정해야 할 겁니다. 문제는 그러한 사관에 의해 서술된 내용들이 얼마만큼 차이를 가지는가 입니다. 학문연구는 현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현실문제를 개념화한 후 분석하고 설명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순서로 진행됩니다. 그러나 학문적 가설(學說)은 일회적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 연구자들과 교류, 비판을 거쳐 점진적으로 이뤄지며 그 결과로 나타난 학설이 어느 정도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가는 이런 과정에 얼마나 충실했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끊임없이 긴장하고 동료 학자들이나 주변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역사지식의 객관화, 체계화를 시도합니다.

 

특정 정치이념이 학문적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결과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학문으로서의 존재가치를 가지지 못합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역사적 진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왜곡․서술하는 역사관이, 국제적 고립을 자초할 역사관이 자국에 진정한 이익을 가져올지도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극단적인 국익지상주의, 자국중심주의의 가치관 하에서 만들어진 책이 역사교과서라면 인류의 문제를 평화적으로, 대화를 수단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강압과 무력으로 해결하려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3. 현재 한국 역사교육의 한계

 

지금까지 한국 교육에서 역사교과, 특히 국사교과의 목표는 국가의 정치적 요구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그 구체적인 지향점은 국가주의적 역사관에 의거한 ‘국적있는 역사관의 확립’이었습니다. ‘국적있는 역사관’은 국민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적을 뛰어넘는 인류’를 만들기에는 불충분합니다. 국가주의적 역사관이 국수적이고 배외적인 역사관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는 점과 경직되고 획일적인 역사인식을 조장한다는 점에서 이는 비판받아야 합니다.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국정(國定)교과서입니다. 국정교과서란 국가에서 정한 한 가지 교과서만을 정규교육에 사용하는 체제로 역사관과 역사적 사실을 독점․해석한다는 점에서 획일적인 역사인식을 주입할 우려가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국정 역사교과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현재 많은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역사교육 방식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해진 역사교과서 없이 개별학교나 담당교사의 재량으로 정해진 교재를 사용하거나 국가의 감독을 적게 받는 검인정 교과서를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 역사관이 요구되었던 특수한 시대적 요구를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저항적 민족주의’가 발생하고 광범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시대에는 그것만이 그 집단의 마지막 남은 보루였으니까요. 어째든 우리는 그것을 통해 버텨왔고 지금까지 살아남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없었다면 조선인도, 한국인도, 한민족도 사라지고 인접 사회집단에 흡수되었겠지요. 실제로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특수한 시대적 요구는 일정시기가 되면 고유한 특수성이 점차 약해지게 되고 보다 새로운 보편적인 정서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민족주의 역사관’이나 ‘국가주의적 역사관’의 유효기간은 언제가 종료될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문제는 과연 지금이 그러한 역사관의 교체가 일어나야 할 시점인가 겠지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얘기해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받은 역사교육 체제하에서는 그런 문제를 검토해볼 기회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국정교과서를 중심으로, 그것도 ‘국가주의적 역사관’의 강한 영향을 받는 역사교과서에서 원론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이 거의 없다는 점은 역사교육이 입시교육의 일환이며 ‘국민 길들이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합니다.

 

4. 역사적 사고력의 함양을 바라며

 

최근에는 정규교육과정 외에도 역사지식의 대중화가 활발해지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학교 수업 외에 우리가 역사에 대한 내용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사극이나 기획물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대중역사서, 역사를 소재로 다루는 영화, 신문이나 잡지의 기획기사, 역사소설, 대중강좌, 답사나 탐방, 인터넷을 이용한 정보교류 등입니다. 분명 과거에 비해 그 수단이나 물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이 사실이며 이를 통해 역사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수준 역시 깊어진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양적으로는 풍부해졌을지라도 질적인 수준까지 깊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 대중의 역사인식은 상당히 감정적이며 가변적인데다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역사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사관)의 정립과 효과적인 피드백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근본적인 원인은 정규교육의 부실에 있습니다. 공교육의 파탄이 사교육의 증가로 이어지고 다시 기초와 응용훈련의 부족이 ‘뭔가 열심히 배우긴 했는데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를 순환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추어라고 고증성이나 객관성을 무시한다면 그건 체계적인 역사지식이 아닌 잡학상식알기 차원에 불과합니다. 네이버 지식인에 넘쳐나는 황당한 ‘지식’들은 결국 ‘反·半지식’이고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입니다.

 

역사학의 의의는 인간사회의 전개과정과 그 이면의 일정한 원리나 추세를 분석하여 사회와 개인에게 현실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알리고 주관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류와 민족,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또는 그런 역사적 구조 자체를 이해함으로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정민족, 특정사회나 집단만이 역사의 중심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역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나아가는 길’이라면, 그리고 그 길이 모든 인간이 나아가는 길이라면 아무도 역사를 배타적으로 소유할 권리는 없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과의 소통과 합의를 감안한다면 합리적인 의견교환을 위한 기본규칙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더 읽어보면 좋은 자료

 

石渡廷南(いしわた のぶお) 著, 양억관 譯. 2005『세계의 역사교과서』작가정신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2005.『미래를 여는 역사』 한겨레신문사

한국역사연구회 외 지음, 2003.『한국사 교과서의 희망을 찾아서』역사비평사



note: 이 글은 원래 2000년 일본의 '자학사관 교과서 비판'활동에 대한 학보사 청탁글을

        2004년에 역사웹진 '역사기행'에 기고하면서 대폭 다듬은 것이다.


수정 (2009.10.11)

역사를 사용하는 법. 그리고 역사학의 변천. by 월광토끼

by 愚公 | 2007/04/21 08:43 | Criticism Board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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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행인1 at 2007/04/21 18:32
읽다보니 왠지 작년의 "자유주의적" 근현대사 교과서 사건이 다시 한번 떠오르네요.
Commented by 愚公 at 2007/04/25 14:48
정신세계가 비슷하면 思考 process도 비슷한 것 같아요.
Commented by sprinter at 2008/12/01 15:59
제가 쓴 글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는 않기는 한데^^;;;

우공님이 올려주신 관점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기는 합니다. 그런게 성공한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도 좀 들고...
Commented by 愚公 at 2008/12/01 16:37
나중에 시간이 나신다면 따로 글을 올려주셔도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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